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카트완 전투 (문단 편집) == 결과 == 당대 기록에 따르면, 셀주크 군은 카트완 전투에서 11,000 ~ 10만에 달하는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한다. 그리고 산자르의 아내와 여러 장수들이 포로로 잡혔다. 이후 야율대석은 여세를 몰아 트란스옥시아나 전역을 공략하였고, 더 이상 대항할 여력이 없었던 산자르는 화의를 요청했다. 야율대석은 화의의 조건으로 매년 3만 디나르를 조공으로 바칠 것 등을 요구했고, 산자르는 어쩔 수 없이 따랐다 야율대석은 서부 카라한 왕조의 본거지인 사마르칸트에 석달간 머물다가 마흐무트 칸의 동생을 옹립한 뒤 귀환했다. 또한 호라즘은 셀주크 제국을 배신하고 서요에게 귀부했다. 하지만 야율대석은 호라산 일대에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고, 산자르는 이 덕분에 세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. 1143년 야율대석이 사망한 뒤, 산자르는 1143년과 1147년에 연이어 호라즘을 공격해 다시 복종시켰다. 그러나 1153년 셀주크 제국에게 복속되어 있던 유목민족 [[오우즈]]인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진압하려 했다가 군 지휘관들의 배신으로 오히려 아내와 함께 오우즈인들의 포로 신세로 전락했다. 그는 3년간 포로 신세로 지내다 가까스로 탈출하였으나 1157년 사망했고, 셀주크 제국은 붕괴되었다. 이후 셀주크는 두번다시 세력을 회복하지 못하고 1194년 완전히 멸망한다. [[분류:셀주크 제국]][[분류:카라한 칸국]][[분류:거란]][[분류:지상전]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